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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드소마> 매혹적인 공포에 대해서 좋구만
    카테고리 없음 2020. 2. 15. 07:10

    *영화의 1부 신에 대한(1러시아를 포함한 글 이다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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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뜩한 것은 무엇인가. 섬뜩한 작동 원리는 서스펜스의 작동 원리와 반대다. 서스펜스는 히치콕의 이야기처럼 폭탄이 터질 때 발발하는 게 아니라 의자 밑 시한폭탄의 초침을 보여줄 때 발발한다. 즉 서스펜스는 관객에게 정보를 재공함으로써 발발한다. 그러면 거룩함은 관객에게 정보를 제한함으로써 발발한다. 예를 들면,<지원>(20개 4)에서 느껴지는 쌀쌀함은 관객들도 주인공을 따라다니는 존재의 정체를 알 수 없다는 데서 일어난다. 만약 이미지의 존재가 하나하나 밝혀지면 더 이상 섬뜩함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저 해결해야 할 사고만 남을 뿐이에요.먼저 한 일과 섬뜩한 일의 저자 마크 피셔는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질문과 관계가 있다고 줄인다. 있어서는 안될 때에 있다, 있을 때에 없다, 갑작스런 자기 타인에게는 사라진다, 라고 하는 것이 기분 나쁜 것입니다. 아이와 레빈의 소설을 영화화한<스테프포도우 와서 이브네>(하나 975)를 예로 들어 보자. 스텝퍼드 와이브스는 스텝퍼드 마을로 이사 온 주인공이 주변 여자들이 하면 둘씩 이상하게 변하는데 사고를 치게 되고 남편들이 자신의 아내를 기계로 대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이야기 영화다. 이 영화는 아내 sound에서는 기계처럼 변한 여자들에게서 섬뜩함을 느낀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인간이 아닌 것 같은 불쾌감(uncanny)이 주는 섬뜩함입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아내를 기계로 바꾸는 남자들에게서 섬뜩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 남자들은 또한 인간 있으면 가져야 하는 사람의 부재한다는 점에서 기계와 다르지 않다(<스테프포도우 와서 이브네>을<겟 아웃>(20하나 7)로 바꿔도 무리는 없습니다). 고런 구조는 아이와 레빈의 대표작에서 한 968년 영화로 제작된<악마의 씨앗>에서도 나타난다. 이 영화에서도 악마라는 미지의 존재(없어서는 안될 때에 있는)가, 쌀쌀함을 자아내는 한편, 여성을 악마의 생 열반에게 바치려는 남편, 또 악마와 다를 바 없다는 점에서 섬뜩함을 자아낸다. 아이이기 때문에 레빈의 섬뜩함은 인간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인간이 가져야 할 특성이 결여된 존재들의 소견입니다. 미드소마의 초반 섬뜩함도 홀이 마을 사람 없이 터져 나온다. 그렇다면 신 <미드소마>는 섬뜩한 영화가 아니다.정스토리오, 오히려 <미드소마>는 섬뜩함을 묻는 영화에 가깝다. 즉 <미드소마>는 공포영화가 아니라 공포에 대한 영화다. <미드소마>는 현대인의 공포를 이해하기 위해 양립할 수 없는 두 세계를 접촉시킨다. 나의 세계는 도시라는 밤의 세계이며, 또 하나의 세계는 스웨덴의 한 시골에 위치한 오전의 세계다. 밤의 세계를 대표하는 인물은 크리스티안이고, 오전의 세계를 대표하는 인물은 펠레이다. 대니가 섬뜩한 세상은 죽은 부모와 동생이 있는 밤 세상이다. 대니가 절벽에서 공포에 질린 이유는 죽은 부모와 동생을, 즉 존재하지 않는 존재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대니가 의지하는 크리스티안은 대니의 고통과 상실감을 볼 수 없다. 대니의 불안과 공포는 대니의 고통과 상실감을 얻지 못하는 크리스티안에 의해 증폭된다. 크리스티안은 스텝퍼드 와이브스에서 주인공의 공포와 불안을 무시하는 남편과 거의 유사하다. 대니를 공포로 몰아넣는 존재는 홀이 마을 사람이 아닌 크리스티안이며, 이렇게 보면 이 영화는 반전된 <악마의 씨앗>이라고 할 수 있다. 두려운 존재, 즉 무엇인가를 결여한 자는 홀이 마을 사람이 아닌 현대인이며, 그래서 그들은 서로를 두려워하는 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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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아라, 아픔을 수반하는 이 즐거움을, 실은<미드 소마>는, 끔찍하다고 하는 것보다 기우다. 그렇다면 그것을 위한 것은 무엇인가. 기도한 것은 어울리지 않는 존재, 과도한 존재로 특징지어진다고 마크 피셔는 이야기한다. 택무 이상해서 이곳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느낌을 주는 존재였다. <미드소마>의 위상을 설명하기 위해 절벽 장면을 줄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두 노인이 절벽에서 자살한 그"sound"에 경악하다 제1곳에 호가의 마을 주민은 생아를 주다가 모두 다른 사람이 맞는 공동체 의식이라고 설명한다. 다만 의식이 자살로 끝난다면 이 의식은 비윤리적, 그러나 이해가 가능한 영역에 있는 의식의 첫 번째 것이었다. 그렇게 살아 있는 노인의 얼굴을 미리 준비해 둔 본인의 무망치로 찌그러뜨리는 것은 이런 설명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있는 과도한 것이었다. 그리고 찌그러진 얼굴을 관객에게 보여줌으로써 이 영화 자체가 과도하고 자존심이 강하다는 인상을 준다. 그 외에도 어울리지 않는 sound 악들, 과도한 침묵 또는 외침은 모두 기도한 것이었다. 마크 피셔에 따르면 기도한 것은 우리의 이해가 부족했다고 한다. 영화 후반부가 되면서 홀이 마을 사람들을 이해할 때 이를 위한 의식은 어느 정도 사라진다.호르가 마을 사람들은 오직 자신만 볼 수 있는 현대인들과는 달리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돼 있다고 믿는다. 이런 홀이 마을 사람들의 신념과 연결시켜 노인의 얼굴을 망치로 때린 행위의 의미를 짐작할 수도 있다. 추측컨대 이 의식은 사람을 남과 구별하는 얼굴이라는 표상을 지워 영혼을 공동체의 초부에 귀속시키는 것이었다. 그런 자신의 홀이 마을 사람들의 신념을 이해한다고 해도 영화의 기백은 여전하다. 예를 들어 대니는 홀이 마을로 들어가기 전에 무심코 자신의 몸이 수풀의 첫 부가 되는 환상을 보고 배우지도 않은 스웨덴어로 홀이 사람들과 소통하게 된다. 이처럼 영화는 초자연적인 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호르가 마을 사람들의 공감대도 초자연적인 힘처럼 느껴진다. 홀가 마을의 여성들이 대니와 함께 슬퍼하며 통곡했을 때 그들은 대니의 아픔을 실제로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호르가 마을 사람들이 영화의 마지막 희생제에서 희생자처럼 울부짖는 것은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들의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본인들의 희생제가 축제의 첫 부라는 점에서 이 희생제는 결미 즐거움을 위한 것이었다. 다시 스토리해 고통이 수반되는 즐거움(주이상수)이었다. 이 즐거움은 미드소마를 보는 관객이 누리는 것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숨겨진 기백이 여기에 있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마치 호르가 마을 사람들처럼, 괜히 본인의 존재는 잠시 잊고 영화 속 인물의 느낌을 느끼며 함께 슬퍼한다. 무심코 자신의 눈을 찌르는 오이디푸스왕을 보기 위해 극장에 갔던 수천 년 전 사람들처럼, 다 같이 아픔을 느끼기 위해 영화를 보는 것이다. 이처럼 <미드소마>는 영화가 갖는 기이한 매혹에 대한 비유 같기도 하다.


    시네 21 www.cine21.com. 박지훈 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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